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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3-02 00:36
삼성노동자 투쟁사 정리
 글쓴이 : 삼성일반노조
조회 : 9,974  
   삼성노동자 투쟁사 정리.hwp (52.5K) [78] DATE : 2010-03-02 00:36:51

<삼성노동자 투쟁사 정리>

노동자 단결권을 부정한 삼성재벌

 

삼성재벌은 일개 기업그룹이 의사 국가의 수준까지 비대해진 현상으로 후발 자본주의의 압축적 불균등성장 과정이 빚어낸 산물이다.1) 삼성 재벌 회장 이건희는 김영삼 정권 초기 ‘국제화 바람’이 한창 불던 1993년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자식과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자”고 하면서 조기 출퇴근제 실시와 개혁 방침을 제시하여 한국 제1의 재벌 총수로서 듣는 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삼성에는 변하지 않은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족벌세습 경영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무노조 경영과 노조탄압이다. 이 두 가지는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피와 땀이 서린 삼성재벌의 자산을 세금도 안내고 자식에게 상속시켜 족벌경영을 고수하는 데 노조가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삼성이 한국 제1의 재벌로 커지기까지 그 배경에는 높은 노동강도와 노동자탄압이 있었다. 삼성은 상대적으로 나은 임금과 복지를 내세워 노동자들을 회유했지만 IMF통치를 겪으면서 노동자를 무려 4만명이나 해고했다. IT산업의 불황으로 삼성재벌은 10%의 노동자를 감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노조가 있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점에 노조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또한 삼성의 무노조 방침은 삼성이 투자한 해외 당사국 노동자의 단결권마저 침해하는 것으로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삼성 노조의 결성은 포철 등 대기업의 민주노조, 공무원의 노조 결성, 그리고 현대 LG 포스코 등의 노조 무력화 정책의 단절과 함께 우리 노조운동이 넘어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1. 삼성의 자본축적과 무노조관리 세습

 

자본축적 과정 삼성재벌의 역사는 1930년대 이병철이 세운 삼성상회와 삼성물산공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재벌은 초창기인 1950년대 전후 생활필수품의 수입대체를 위해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삼성재벌은 3개의 상업(무역)회사(삼성물산, 효성물산, 근영물산), 3개의 제조업(제일모직, 제일제당, 삼성비료) 그리고 4개의 금융업(천일증권, 안국화재보험, 한일은행, 조흥은행)의 계열기업을 거느린 대기업 집단이었다. 독과점 상태에서 가격과 품질경쟁이 필요 없는 상태에서 원조자금과 정부보유 달러를 끌어들여 설비를 늘리고 원료를 배정 받아 가공하여 국내에 판매하여 쉽게 돈을 벌었다. 이 때 얻은 이윤을 기업 자체에 축적하지 않고 개인재산을 축적, 기업을 문어발 식으로 확장하는데 사용했다.(조동성, 1997, 167쪽) 삼성은 1950년대 후반 재계 1위의 지위를 차지한 이래 현대 등과 선두다툼을 벌이지만 반세기가 지나도록 정상그룹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1961년 군사구테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몰리자 조흥 상업 한일 등 3개 은행을 국가에 헌납했다. 이후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사업을 한다는 핑계로 상속세 한 푼 물지않고 재산을 상속하는 장치를 마련했다.(참여연대,1998 참조. wwwsamsunggroupunion.org. 참조)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편승하여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수출에 주력해 삼성물산이 우리나라 수출 1위를 차지했다. 1960년대 후반 한국비료를 설립했으나 준공과 동시에 사카린밀수 사건이 터지자 이 회사를 국가에 헌납했다.

 

1970년대 수출증대 정책에 편승하여 종합무역상사를 세워 특혜금융 규제완화의 특혜를 받았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 이후 삼성은 종합상사를 통해 해외시장 진출에 주력하는 한편 주력업종을 제일제당 제일모직의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중화학공업과 전자산업의 장치 기술산업으로 바꾸었다. 1969년 삼성전자 설립을 시작으로 삼성중공업(1974), 대성중공업(1977), 삼성조선(1977), 삼성석유화학(1974), 삼성종합건설, 삼성전관, 삼성코닝, 삼성정밀, 삼성통신을 설립했다.

 

1988년 이건희 체제가 되면서 삼성전자의 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충남 서산에 석유화학 콤비나트를 세우고, 삼성신용카드를 설립하여 그룹의 주력 부문을 전자에서 전자-화학-금융으로 다원화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삼성은 ‘질 위주의 경영’으로 혁신을 주장했지만 결국 재벌 2세 경영의 위험성을 드러냈다. 이건희 체제는 메카트로닉스분야를 주력산업으로 선택, 먼저 자동차산업, 다음으로 항공산업에 뛰어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95년 삼성자동차공장을 설립하고 수조원의 부채를 지면서 삼성은 한 때 부도위기설이 나돌며, IMF 사태 초래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삼성은 결국 삼성자동차를 프랑스의 로노자동차에게 매각했다.

 

IMF 통치 직후, 실패한 삼성자동차산업 투자와 관련된 삼성생명 상장과 이건희 회장 아들 이재용의 변칙상속이 문제가 된 시점에 대통령 아들 김홍업에게 삼성재벌은 5억원을, 현대자동차는 16억원을 준 사실이 밝혀져 삼성이 강조한 ‘투명경영’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삼성재벌 확장의 역사는 한국의 산업 변천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했다. 그것은 삼성이 군사독재와 결합하면서, 정부가 요구하는 산업분야에 뛰어들어 각종 특혜를 받아 이윤을 실현했다.(강만길 엮음, 2000, 282쪽) 삼성의 이병철은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의 전신)를 만들어 그 회장을 맡으면서부터 정부의 정책 결정에 관여했고, 김영삼 정권 때는 2세 이건희의 거처인 ‘승지원’이 제2의 청와대라는 말이 나오도록 정경유착의 근원이었다.

 

불법 상속과 2세 경영의 위험 삼성은 1대 이병철 체제에서 2대 이건희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수조원의 재산을 탈법적으로 상속하여 불과 수백억원의 상속세를 납부했다. 다른 자녀에게는 신세계백화점, 제일제당, 새한전자, 중앙일보와 같은 기업을 나눠주었다. 2000년 초 이건희는 삼성생명주식을 대거 매집하여 그 전해 10%에 불과하던 지분을 26%로 늘렸다. 이 과정에서 이병철 전 회장의 상속지분을 실명 전환했거나 계열사 자금을 동원, 차명지분을 실명 전환했다.

 

또 이건희는 IMF 통치 이후 3대 이재용에게 재산을 탈법적으로 상속했다. 이건희는 자신이 병들자 아들 이재용에게 서둘러 1999년까지 4년에 걸쳐 재산상속을 마쳤다. 이들 부자는 66억원 상속하고 상속세를 16억원을 내었는데, 2000년 9월 이재용의 재산은 5조원이나 되었다. 삼성이 쓴 방식은 부당 내부거래를 통하여 세금을 포탈하고 주가를 조작하는 불법 탈법 상속이었다.2) 부동산금융 실명제도 그에게는 무력했으며, 국세청은 뒤늦게 탈법적인 상속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했을 뿐이었다. 참여연대는 3세 이재용에 대한 불법상속과 상속세 탈세의 문제를 제기했다. 1998년 삼성전자 주총에서 참여연대는 “회사발전에 전혀 기여를 하지 못한 이재용에게 사모 전환사채를 대량 인수하도록 하는 특혜를 베풀어 수백억원의 불로소득을 챙기도록 한 것은 도의적 차원을 넘어 회사에 손해를 입힌 것”이며, 삼성자동차에 대한 수조원의 위장 출자 의혹과 삼성전자의 투자 잘못으로 인한 미국 자회사 AST의 경영부실을 비판했다. 또 전국의 법대교수들은 삼성의 불법 상속을 법원에 제소했다.3)

 

삼성자동차의 실패는 총수의 전횡, 선단식 경영, 정경유착에 따른 특혜성장과 같은 최소한의 자본주의적 합리성조차 결여한 총수의 독단경영의 폐해를 드러낸 사례이었다. 이건희는 1994년 개인 취향에 따라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계약을 체결하고 1995년 삼성자동차를 설립했다. 삼성의 신경영은 김영삼 정권의 ‘신한국’ ‘신경제’와 맞물려 자본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이건희는 “질적 경영을 위해서는 마누라와 자식만 빼놓고 다 바꿔야 한다”며, “21세기 국가장래를 위해 자동차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의 오만함은 1995년 5월 북경에서 한국특파원들과 만나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한 말에서 극치를 이뤘다.

 

그리고 그는 자동차 산업에 손을 댔다. 투자액은 5조원이 넘는데, 자본금은 9천억원이고 나머지는 금융권 부채이었다. 그러나 1996년 11월 부산공장을 완공한지 2년 만에 손을 들었다. 세계적으로 과잉설비로 신음하는 자동차산업 부문에서 나타난 한국재벌의 과잉투자의 상징(탭, 2001, 19쪽)인 삼성자동차의 무모한 투자는 기아자동차 등 다른 자동차업체들에게 과잉설비투자를 유발하면서 자동차업계 전체와 한국경제를 위기로 몰아간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경영능력이 없는 재벌 2세 개인의 기업집단 지배에 따른 오류로 자동차업계, 금융계, 부산지역 경제가 혼란에 빠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4)

 

삼성재벌의 무노조 경영, 노동자탄압

 

노조거부는 사회적 범죄 삼성의 노조 거부의 뿌리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이병철 전 회장의 노조관에서 비롯했다. 그의 아들 이건희는 어느 자리에서 “왜 삼성에 노조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를 키워준 이모의 딸이 제일제당에 입사했는데 노조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을 욕하는 걸 보고 이 땅에서는 절대 노조는 인정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구영식, 2000b, 103쪽) 이건희는 그러면서 “반대를 위한 노조, 파괴하고 거저 먹는 노조는 안됩니다. 그래 갖고선 노조가 아니라 어떤 조직도 안됩니다. 상호 이익을 추구하여 공생하자는 점에서 삼성이 다른 회사보다 유대가 강하다고 자부합니다. 삼성에는 노사협의회가 있는데, 앞으로 더욱 키울 작정입니다”라고 했다.(강준만, 1997, 90쪽)

 

이건희는 입으로는 ‘공생’을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삼성을 삼성 노동자와의 공동의 것으로 보거나 국민경제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이건희 개인 또는 일가의 것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사고방식방식을 가지는 한 그와 대치되는 노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자본과 경영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유권을 장악한 재벌 총수, 대부분 2세 총수는 선단식 경영, 상호지분 출자, 정경유착, 총수 독단 경영, 탈세와 불법 상속과 같은 탈법과 오류를 저질렀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삼성 전체주식의 0.6%, 정주영은 현대 그룹 주식의 0.43%, 구본무는 LG 그룹 주식의 0.43%, 최태원은 SK그룹의 3.13%의 지분을 가지고 마치 황제처럼 재벌을 지배했다. 평균 1% 내외의 지분으로 99%의 지분을 가진 주주의 이익과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결국에는 재벌의 파산과 국가 경제위기를 초래하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노동자와 국민에게 전가했다.

 

삼성은 노동자에게 일을 시키고 약간의 임금과 복지를 제공하면 되는 대상으로 보았다. 노동자가 노동자 이전에 인간임을 부정했다. 소유와 경영에 노동자가 참여하거나 견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노동관계법이 규정하는 노동3권, 노동조합의 부정으로 나타났다.

 

삼성은 무노조 방침을 고수하고 노조를 막으려고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삼성재벌은 노조 추진 노동자에게 회유 매수 공갈 협박 납치 감금 폭력테러 해고와 공권력을 이용한 구속?수배를 일삼고, 유령노조의 조직과 노조 강제해산 등의 갖은 수법을 썼다. 대한민국에서 나온 모든 탈법 수단을 망라했다. 이런 수법은 삼성과 2세들의 재산 싸움으로 떨어져 나간 친족회사인 제일제당, 신세계, 새한전자, 중앙일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또 자회사나 하청 등 관련 회사에게 압력을 넣거나 직접 개입하여 노조결성을 막았다.5) 그렇지만 삼성재벌에 속한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기본권과 삼성재벌이 가진 문제점 해결을 전망하면서 더디지만 집요하게 노조 결성을 추진했다.

 

2. 삼성의 노조 추진

 

1) 노조결성 추진의 역사

 

지난 반세기에 걸친 삼성재벌 노동자의 노동조합 결성 노력은 삼성재벌의 노조결성 저지 움직임과 일치했다. 시기별로 살펴본다.

 

1950, 60년대 1950년대 대구의 제일모직에서 노조를 결성했는데, 이병철 회장은 “회사를 문닫겠다”고(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4, 473쪽) 협박하고 임금을 갑절로 올리는 조건으로 조합원을 회유하여 노조를 해산시켰다.6)

 

1970년대 1977년 당시 삼성 재벌 안에는 이미 노조가 있는 기업을 인수한 동방생명보험 외에는 노조가 없었다. 중앙개발의 용인자연농원에서 노조를 결성하자 “노조가 결성되면 이병철 회장님이 문을 닫는다. 이전에도 제일모직에서 이런 일로 문을 닫은 적이 있다”고 하여 노조원들이 해고되어 무산시킨 바 있었다.

 

전국화학노조의 계획에 따라 제일제당 김포공장(미풍공장)에서1977년 10월 22일 정을순 등 13명이 모여 노조를 결성했다. 회사가 조합원 11명에게서 탈퇴서를 강제로 받아 3명이 조합원만 남게되자 화학노조와 영등포지역 노동자 100여 명이 미풍제당 앞에서 농성해 회사측에게서 노조를 인정한다는 합의서를 받고 농성을 풀었다. 그러나 제일제당은 노조에서 탈퇴한 11명을 회사 식당 모아놓고 “노조탈퇴 만세”를 외치도록 강요하고 오경식에게 탈퇴하라고 협박했다. 화학노조에서는 10월 27일 700여명이 미풍공장 앞에서 시위를 하고 회사측이 동원한 500여명과 난투극을 벌이며 수십명이 각목과 돌멩이에 맞아 부상당했다. 회사측은 경찰의 대화 주선도 거부하고, 노동청에서 노조설립신고서를 빼오고, 노동청은 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끝까지 버티어오던 11월 31일 오경식이 사표를 제출하고 김광숙이 해고되면서 노조 결성은 실패로 끝났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4, 472~482F쪽)

 

1980~97 1980년 ‘서울의 봄’ 때 신세계백화점에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이 있었다.(1980. 4. 4) 1987년 6월 이후 노조의 설립과 민주화가 사회적 대세이던 상황에서 삼성 내의 여러 계열사에서도 노조설립 움직임이 다수 있었으나 중앙일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중앙일보에서도 회사의 방해가 있었지만 사회의 비판여론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운 언론사의 특성도 작용해서 1987년 12월 노동조합 결성에 성공했다.

 

1987년 7월부터 삼성중공업거제 조선소, 창원공장, 삼성전자 수원단지, 안국화재 등의 노조설립에 대해 삼성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기간인 8월 3일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이제 노조는 피할 수 없는 대세이며 노사가 공존공영의 길로 나가기 위해 스스로 비민주적 요소를 제거해야할 때”라며 노조활동보장을 다짐했을 때 삼성만이 유독 여기서 이탈했다. 수원지방에 밀집한 삼성전자단지는 노동자 투쟁을 예방하기 위해 임금을 18% 자진 인상하고 적극적인 고충처리와 해고경력자 1명을 발견하면 같은 부서 노동자 20명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는 삼성재벌이 창원 거제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철저히 묵살한 것과 대조된다.

 

삼성중공업 l987년 8월 창원 2공장(중장비 사업본부, 2공장 위원장 장종진, 클라크 위원장 정재영)에서 수백 명이 민주노조 결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자 바로 다음 날 자본측은 구사대를 진입시켜 충돌을 일으켰다. 노동자들이 노조설립 신고서를 해당관청에 제출하자, 자본측은 노동조합법의 복수노조금지조항을 악용하여 직장 등 감독직 사원 명의의 노조설립신고서를 하루 앞선 날짜로 제출하여 노동자측의 신고서를 반려토록 만들었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창원시 부시장실을 점거한 끝에 노조 대신 노사협의회를 재구성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1988년 4월 거제조선소에서 노사협의회의 임금교섭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자 1,500명 가량의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노조설립 등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에 돌입하고 노조를 결성했다. 노동자들은 구사대와 전경의 저지를 뚫고 군청으로 가서 노조설립 서류를 접수시켰으며 마침내 수백 명이 군청을 점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7)

 

같은 해 6월에 세 번째 노조설립운동을 펼쳐, 2개 도 이상에 걸쳐 사업장이 있을 때에는 노동부에 직접 노조설립 신고를 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상경하여 노총 산하 금속연맹의 가맹인준증을 받고 노동부에 설립신고서를 접수시켰으나 삼성측이 하루 앞선 날짜로 도청과 시청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하여 노동자들의 시도를 무산시켰다. 이에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하고 상경하여 한국노총 점거 투쟁을 했으나 노조 설립을 못했다. 3차 투쟁에서 확보한 금속노련의 인준증을 근거로 1989년 1월 금속노련 거제사무실 안에 삼성중공업 법외노조를 설치했다. 이 법외노조는 노동자 1,000여명이 가입했고 노조홍보물을 발간하고 유령노조 위원장을 방문하고 현장동지회를 구성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대법원이 회사가 설립한 어용노조가 불법이라고 판결하지만8) 삼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법외노조는 결성이래 4년 넘어 지속했지만 국가보안법에 의한 지도부의 구속과 같은 탄압의 계속, 노조설립 전망을 상실케 만드는 노동법과 노동행정 체계, 노동자협의회와 법외노조의 이해공유로 결국 l993년 4월 법외노조 사무실을 폐쇄했다.

 

96~97총파업 때인 1997년 1월 15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2,000여명이 3시부터 5시까지 작업을 거부하고 거제조선소 노동자협의회(의장 김문기)의 주도로 ‘노동법 개악 저지를 위한 삼성노동자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 같이 많은 노동자가 모인 것은 닥쳐올 것으로 감지되는 고용불안 때문으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1996년 창원 1공장에서 700명이 퇴사하고 조선소도 설비 가스라인 유틸리티장비 등 공무분야를 외주로 한다는 소문이 있고 노조도 없었기 때문이다.

 

1997년 4월 삼성중공업 창원1공장 전 노동자협의회 의장 이재용을 징계 해고했다. 또 5월에는 경남노동자협의회(경노협) 김윤규 의장과 박성철 사무국장을 1994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대의원대회에 참가한 것과 관련해 이적단체 구성 가입 혐의를, 경노협 기관지인 ??전진하는 노동자??와 관련,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혐의를 적용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그런데 이들이 삼성중공업 출근투쟁 관련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 고발된 상태에서 구속한 것은 노조 결성지원을 차단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9)

 

삼성화재 노동자 30여명이 1987년 11월 기습적으로 노조를 결성했으나 지방 지점 소속 직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신고증을 교부받지 못하는 사이에 유령노조가 신고증을 교부받아 삼성중공업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노동자 50여명이 12월 2일부터 노총회관에서 농성을 벌였으나 결국 회사측과 평사원협의회 구성에 합의했다.

중앙일보 중앙일보는 1987년 12월 2일 기자들을 중심으로 노조를 결성하고 신고서를 제출하려 하자 업무직 직원들이 제지하고, 그 사이에 회사측이 사장 명의로 이의신청을 접수하여 신고증 교부를 지연시켰다. 노조는 분임 토의 방식으로 농성을 벌인 결과 6일 만에 설립 신고증을 받았다. 삼성재벌에서 유일하게 자생 노조가 생겼는데 언론사이기 때문에 노조 설립이 가능했다.

 

삼성전자단지 삼성전관(수원)에서는 1988년부터 1992년 사이에 4차례에 걸친 노조설립 투쟁이 있었다.

 

삼성전관 1985년 말 경부터 노조설립 준비 시작했으나 회사는 노동자 대투쟁의 와중에서 1987년 8월 노사협의회를 설립했다. 삼성전관 가천공장에서 1987년 8월 노조설립 보장을 요구하는 10일간의 파업이 발생했으나 노사협의회의 활성화라는 타협과 핵심 노동자의 강제사직과 같은 탄압으로 종결되었다.

 

이어 1988년 삼성전자단지 안의 ?노동조합준비위원회?사건, 1991년 4월 산재보상투쟁 등이 있었다. 1988년 말 그간의 삼성해고자들이 모여 꾸려진 삼성전자단지 복직실천위원회(복실위)는 여기에 1989년 4월 공안정국 아래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결합하면서 ‘삼성노동자 소식’이라는 유인물을 13호까지 발간했다.

 

1989년 노조 설립을 시도했으나 이장호 등 다수 노동자가 해고, 구속되며 실패했다. 1991년 4월 삼성전관 생산3과 ITC직에 근무하던 김병무 등 3명이 작업 도중 숨진 것을 계기로 폭발해 3일에 걸쳐 약 1,500명의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여 삼성이 결코 노동운동의 사각지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결국 김용주, 백내섭 두 사람이 해고 구속되고 복직실천위원회 활동을 하던 유제현, 윤권영 두 사람이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1992년 9월 22일 법원은 삼성전관이 법원의 유제현에 대한 복직 판결을 이행하지 않자 삼성전관 총무과 컴퓨터 60대에 차압 딱지를 붙였다.(유제현, 1994, 136쪽)

 

1998년 9월 삼성전관 양산공장 구조조정 반대를 이유로 노사협의 총괄위원 송수근이 징계 해고되고, 다음해 3월 박시근이 송수근과의 친분을 이유로 강제 사직 당했다. 1999년 12월 수원 삼성전관 노조 설립 관련 고영선 외 4명 강제 사직시켰다.

 

삼성코닝(수원)에서도 1989년 노조결성 움직임이 있었으며, 2000년 11월 사내기업 노동자 노조결성 준비를 삼성이 사전에 파악하여 5분 먼저 수원시청에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하여 노조 설립을 원천 봉쇄했다.

 

새한전자 새한전자는 1995년 노조결성 움직임이 있자 한발 앞서 유령노조를 관할 관청에 신고하여 노동조합 설립을 방해하고 공권력을 통해 노동자를 탄압했다. 7월 6일 14시경 노조인정과 고용보장을 요구하면서 교대로 텐트농성 중인 노동자를 구미경찰서의 비호 아래 골든벨이라는 용역사 깡패를 동원하여 새한노동조합 조합원들을 전기봉 가스총 각목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집단 폭행했다. 10일 국제경호센터 용역깡패가 새벽에 술을 먹고 여자기숙사에 난입해 행패를 부렸다.

1995년 10월 4일 삼성그룹에서 새한 미디어 그룹으로 분리된 제일합섬 구미 공장 노동자 14명(가입대상 1,500명)이 노조(위원장 장인석)를 결성하고 구미시청에 설립신고서를 접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재태를 위원장으로 하는 6명의 유령노조 설립신고서가 먼저 접수되어 제일합섬이 삼성그룹 당시의 복수노조 금지 조항을 악용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역시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한솔그룹은 1994~95년에 걸쳐 인수한 회사 가운데 노조가 있던 한솔화학(옛 영우화학), 한솔판지(옛 동창제지), 한솔전자(옛 한국마벨), 한솔텔레콤(옛 광림전자)의 노조를 해체하고 노사협의회로 대체했다.

 

1996년 11월 삼성은 계열사 이천전기 어용노조 민주화를 추진하던 노사협의회 위원 김성환을 징계 해고했다. 1998년 정부가 이천전기를 퇴출기업으로 발표하자 삼성은 500명을 해고하고 회사를 일진그룹에 주식양도로 매각했다. 이에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84명을 해고자들과 분리시키려고 인천 동부경찰서는 업무방해 혐의 조사와 대질신문을 이유로 정대현 유순조를 출석케 하고 바로 구속하고, 1999년 다시 2명을 구속했다.

 

IMF통치 이후 IMF사태 이후 삼성이 구조조정의 이름으로 4만여 명을 해고하면서 삼성노동자의 투쟁은 복직 투쟁과 결합되면서 노조 추진 움직임을 강화했다.

 

삼성생명과 삼성증권은 이미 노조가 결성돼 있는 기업을 삼성이 인수한 경우로 노조는 있었으나 철저히 무력화되었다.

 

삼성생명은 1998년 5월 두 차례 구조조정으로 1,700명을 강제 사직시켰다. 삼성생명은 또 1998년 구조조정이 잘못된 것이라며 2001년 1,000명을 추가 해고하려 했다. 해고 노동자 350명이 1996년 6월 삼성생명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삼성생명서비스에 1999년 11월 삼성생명서비스노조를 결성했으나 일주일만에 강제 해산되었다.

 

삼성증권노조는 1983년 6월에 출범했으며, 삼성증권은 1982년 한일투자금융이라는 단자회사로 출발해 1991년 업종전환 정책에 의해 국제증권(주)으로 인수되고 1992년 다시 삼성(주)으로 인수됐다.

 

삼성플라자 유통사업부문을 영국 할인전문업체 패스코와 합작을 추진하면서 고용불안이 예상되자 삼성플라자 직원 11명은 1999년 3월 3일 (주)삼성물산삼성플라자노조 설립총회(위원장 고재문)를 열고, 4일 성남시청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했으나, 회사측의 회유와 협박으로 이틀만에 취하서를 냈다.

 

삼성시계에서 1999년 임금인상과 노조결성을 시도한 김용희의 경우, 회사는 깡패를 시켜 그의 부인을 성폭행 하게 하는 등 가정을 파탄내고,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복직투쟁을 전개한 김용희를 구속시켰다.10)

 

1999년 3월 8일 삼성자동차의 빅딜과 관련, 삼성전기 자동차사업부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일부 직원들이 부산 강서구청에 노조설립신고서를 제출하고, 5년 이상 고용보장, 평균임금 6개월분의 위로금 지급을 요구했다.

1999년 11월 (주)보광노동조합 조합원에게 탈퇴를 강요했다.

 

2000년 4월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며 본관 점거농성을 벌이던 성균관대 학생들은 1997년 성균관대학을 인수한 삼성재벌이 재단을 장악하기 위해 교수 대학강사노조 교직원노조 학생회 등 학내 민주단체 구성원의 성향을 개인별로 파악, 분류한 문건을 발견했다. 삼성은 대학강사노조 활동이 가장 활발한 성균관대에서 강사 임용 3년 제한 제도를 도입하여 노조위원장을 하면 그 다음 학기 갖가지 사유를 만들어 강의를 해촉해 노조 활동을 위축시켰다.

2000년 삼성은 3세에게 재산을 불법적으로 상속하고 탈세를 하는 한편 구조조정을 이유로 삼성 전 계열사 4만여 명의 노동자를 퇴사시켰다.

 

2,000여 명의 삼성생명 노동자를 퇴사시키고 그 빈자리에 삼성자동차 노동자를 채용하고 계약직 노동자로 메웠다. 이러한 삼성의 이중적 행동에 대해 삼성노동자의 투쟁은 삼성그룹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상공회의소 노숙투쟁, 서울역 천막농성, 국가인권위 농성, 집단단식 투쟁을 전개했다. 2003년 11월 24일에는 43일째 삼성본관 앞에서 단식 노숙농성을 하던 윤진열 위원장이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이에 대해 삼성은 해고자들을 업무방해로 고발하고 삼성생명 21층에 엘살바도르 대사관을 유치하여 삼성생명 앞의 집회를 법적으로 원천봉쇄했다.

 

2000년 5월 25일 경호업체인 삼성에스원(서울) 노동자들의 노조설립을 유령노조 설립으로 바꿔쳤다. 민주노총과 삼성해복투 관계자들이 25일 오후 4시 50분 에스원노조 설립신고서를 접수시키고, 다음날 민주노총이 중구청에서 복수노조가 아님을 확인받고 27일 11시까지 설립필증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그러나 27일 아침 회사측에서 또 다른 노조를 강남구청에 신고하고 설립필증을 받는 상황이 발생했다. 전산을 통해 확인한 결과 회사측의 노조가 민주노조보다 20분 먼저 일찍 신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 날까지만 해도 체크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중구청 관계자는 민주노조파 한 간부에게 사태의 전말에 대해 “엄청난 힘이 동원된 것 같다. 물론 증거는 없다. 누군가 양심선언을 하지 않으면 밝힐 수 없다”고 했다.(구영식, 2000a, 96쪽) 1999년 부산 삼성에스원에서도 노조 설립 허가증을 받았으나 회사의 방해로 무산되고, 2000년 5월 서울 삼성에스원 노동자들이 노조를 설립하려하자 삼성은 유령노조 설립으로 이를 원천봉쇄하고, 8월 삼성에스원(부산)은 노조설립을 추진하던 노동자들을 납치 해고했다.

 

2001년 1월 삼성SDI(구 삼성전관)에서 1997, 1999년 말 각각 비밀리에 결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99년 말 노조 설립을 추진하다가 폭력행위로 구속된 박경렬은 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하여 그 가족들이 석방탄원서를 요구했으나 회사측은 이를 거절했다.

 

삼성SDI는 IMF사태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사업을 확장했으나 불안한 요인을 인원감축이나 분사를 통해 해결했는데 이는 노조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삼성SDI 해고자 고영선의 증언, 구영식, 2000a, 96쪽) 1999년 삼성SDI 울산?수원공장에는 노사협의회, 천안공장에는 한마음협의회를 설립하면서 노조 추진 노동자를 1인당 4~6천만원을 주고 회유했다.

 

1998년 8월 이천전기, 삼성중공업, 삼성전관 울산해고노동자들이 삼성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해복투) 결성준비위를 결성했다.(1999. 8) 2000년 1월 26일 이천전기, 삼성중공업, 삼성전관 양산공장, 삼성생명의 해고 노동자들이 ‘삼성그룹 해고노동자 원직복직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해복투는 발족 선언문에서 “IMF 구조조정 아래 삼성노동자들은 삼성이 평생 직장이 아님을, 이씨 왕조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음을, 그래서 민주노조를 건설하여 생존권과 고용보장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김성환?이정미, 2002, 29쪽)

 

2000년 9월, 해복투 회원은 360명 정도이었다. 삼성해복투는 삼성에게 수십년간 자행해온 노동자 탄압에 대해 공개 사과할 것, 노조 관련 해고자들과 구조조정 당시 강제 해고된 노동자들을 원직 복직시킬 것, 법에 보장된 노조 인정을 요구했다. 삼성해복투는 2001년 8월 24일 삼성그룹 해고노동자,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소속 노동자 400여명은 ‘민주노조 건설과 해고자 원직복직 쟁취 결의대회’를 열고 “삼성재벌의 무노조 노동자 탄압 정책을 분쇄하고 민주노조를 설립하기 위해 삼성재벌의 비인간적 노조탄압 실태를 전국을 돌며 알리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삼성재벌 불법세습 척결, 해고자 원직복직, 노조탄압 분쇄구호를 외치며 삼성전자-삼성코닝-삼성SDI 1.5km구간에서 거리행진을 벌였다.

 

신세계에서 1998년 10월 8일 노조를 결성하고 1,000여명이 조합에 가입하고 결성신고 인준증도 받았다. 그러나 삼성재벌은 이를 탄압 회유하여 한마음협의회를 강제로 구성시켰다.

 

프로야구 선수협의회가 현대판 노비문서를 거부하며 노조 설립을 추진하자, 삼성야구단이 앞장서서 노조 결성을 방해했다.(2000. 2)

중앙일보에 노조가 있지만. 96~97총파업 때 회사는 중앙일보 노조의 파업결의 찬반투표를 원천 봉쇄했다. 노동법 개악과 관련, 언론노조의 투표를 물리력으로 방해한 곳은 중앙이 처음이었다. 2000년 11월 전국언론노조 출범 때 중앙일보 노조는 조선일보 노조와 함께 ‘조합원의 정서’ 때문이라는 이유로 불참했다. 이 노조는 노동자의 산업별, 계급적 단결을 거부하는 기업별 노조의 전형이었다. 또한 중앙일보는 조선일보와 함께 언론노동자들의 산별노조인 ‘전국언론노동조합’에 뒤늦게 합류하지만 소극적이었다.

 

한편 중앙일보사에서 분사되어 중앙일보 신문을 인쇄하는 동양기획과 중앙기획 노동자들은 2000년 6월 노조를 결성했으나, 같은 해 9월 사측의 노조해산 요구에 항의 파업을 결의하자 사측은 노동자 123명을 해고했다.11) 중앙일보 인쇄노조 전 위원장 조남영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2002년 7월 폭우 속에 이틀간 중앙일보 전광판 위에서 농성을 한 끝에 회사측과 해고자 6명 복직에 합의했다.

 

한편 삼성그룹 이병철 전회장의 장녀 이인희가 실제 소유주인 마산고려병원은 그동안 유령노조 설립 시도를 비롯해 노조 사무실 강제 이전, 위원장 부서 이동 시도 및 노조 탈퇴 강요와 집회 방해 등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았다. 노조 설립 전에는 폭행과 모욕이 빈발했고 생리수당은 물론 생리휴가도 주지 않아 왔으며 보상 없는 연장근로가 일상화돼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4월 11일 노조가 결성된 뒤 병원측은 각종 부당노동행위를 했지만 결국 노조 결성 넉 달만에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삼성의 무노조 신화의 한 귀퉁이가 무너진 것이다.

 

삼성상용차 출신으로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SDI 삼성SDS 삼성에버랜드 등으로 강제발령이 난 노동자 16명은 삼성그룹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대구시 남구청(구청장 이재용)에서 설립신고 필증을 받았다.(2001. 8. 1) 삼성그룹에서 초기업 단위 노조가 결성된 것이다.

 

이 노동조합은 기업별노조가 아닌 일반노조이기 때문에 삼성그룹의 계열사 노동자를 포괄할 수 있고 삼성그룹 노무관리 방식의 하나인 분사 소사장제에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삼성그룹노조 초대 위원장 정지찬은 “이미 서류상 노조가 결성된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에스원 삼성정밀 등 네 곳을 제외한 전 계열사를 상대로 노조활동을 펼쳐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삼성노조는 결국 대구시의 노조 설립 반려조처로 무산되었다. 삼성 해고자들은 2002년 7월 ??벼랑끝에서 희망을 움켜쥐고??라는 백서를 출간했다. 김성환은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 유지되는 것은 경영전략의 승리가 아니라 초법적인 노동자 탄압의 결과임을 밝히기 위해 백서를 낸다”고 했다.12)

 

2002년 7월 29일 식품 저장 쇼케이스를 만드는 광주의 아르네삼성 노동자들은 삼성에게 노조설립신고서 사본을 빼앗겼지만 노조설립신고서 원본을 광산구청에 제출하고, 7월 31일 노조설립신고필증을 받았다. 그러자 삼성은 삼성아르네 현판에서 삼성 로고를 지우고 삼성전자 광주공장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이것은 삼성에는 노조가 없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여 노조설립 움직임이 삼성전자로 번질 것을 막으려는 행위이었다.

 

2003년 9월 5일 삼성플라자노조가 성남시청에서 신고필증을 받아 조합활동에 들어갔으나 회사측의 압력으로 조합 간부들이 회사를 떠나면서 한 달만에 무너졌다. 2003년 3월 말 호텔신라노동조합을 결성했으나 지도부의 행방불명과 회사측의 복수노조 조항 악용으로 실패했다.

 

삼성일반노동조합은 삼성정규직과 삼성관련 하청, 비정규직노동자들를 대상으로 결성해 2003년 2월 6일 신고증을 받았다.

 

2004년 7월에는 노동자들의 핸드폰을 불법복제하여 죽은 사람의 명의를 도용하여 삼성일반반노조 김 성환위원장등을 도감청 및 위치추적하였고 삼성SDI에 근무하다 퇴사한 여직원의 핸드폰으로 삼성SDI노동자들을 위치를 추적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삼성노조추진연대 먼저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회의(전노협)은 1994년 6월 삼성중공업 삼성화재보험 삼성지게차 등에서 잇따라 확인되고 있는 유령노조문제는 삼성그룹의 무노조 경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유령노조 여부에 대한 정부측 공식 입장요구와 이후 사태 전개에 따라 삼성본관 앞 규탄집회 등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 준비위원회는 삼성전자 독일지사의 노조결성 방해움직임(1995. 3)과 삼성중공업 삼성생명의 유령노조 시비 등과 관련해 삼성그룹을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제87호 위반으로 ILO에 제소하기로 했다. 민주노총은 1997년 무노조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삼성그룹과 노조활동이 미약한 포항제철 선경 코오롱 등을 상대로 노조설립 또는 어용노조 민주화운동?을 적극 추진키로 결의했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5월 15일 삼성본관 앞에서 100여 명의 조합원이 참가한 가운데 삼성그룹의 무노조 정책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금속노조연맹도 삼성노조 추진을 선언했다.

 

민중운동 진영에서는 많은 재벌의 해체와 현대재벌의 위기와 같은 것이 삼성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투명경영’(참여연대), ‘국유화’(??주간정세동향??)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사이버공간에서도 삼성의 횡포를 규탄하는 사이트가 많다. ‘스톱삼성 사이트’에는 삼성그룹의 불법세습에 대한 시민들의 고발 처벌을 촉구하는 관련자료 토론실 등이 들어있다.

 

삼성의 노조거부에 대한 국제적 압력도 있었다. 독일 헤센주 노동법원은 1995년 3월 30일 물의를 빚고 있는 삼성전자판매회사의 종업원조직 구성방해 사건과 관련하여 “오는 5월12일까지 종업원 평의회를 구성되도록 하라”고 판결했다. 독일에서 종업원 평의회는 사내 복수노조의 연합체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다국적 기업들의 생산기지 이전 등 급작스런 경영방침 변경에 따른 대량실업 등을 막기 위해 EU가 이의 설립을 요청한데 따른 것이다. 결국 삼성측도 이 판결을 받아들여 노동자 6,500명의 삼성유럽본사는 노사협의회를 구성했다.

 

2) 삼성의 파괴 전략

 

강제수단 흔히 ‘관리의 삼성’이라고 하는데 노조 결성을 저지하는 데는 이 말이 맞는다. 삼성의 노무관리는 철저하여 이건희 회장 비서실을 사령탑으로 해서 계열사 노무관리부서는 기획과 전략을 수립하고 노동자 동태 감시는 현업 부서에서 했다.

어느 삼성 노사관리자의 참회(반도기획)의 저자 김형극은 1987년 8월 삼성 비서실에서 작성한 ‘노사관리지침’(345 사업장 수호전략)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노조를 탄생시켜서는 안 된다. 특히 노동조합법 제3조 5항에 명시된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철저히 활용한다.

 

둘째, 위장 어용 유령노조를 완벽하게 설립하려면 시청 또는 군청에 매일 지킴이를 보내는 한편 시청 또는 군청, 경찰서 등의 관계자에 대해 매월 지속적인 급여를 지급하여 ‘준삼성직원화’하여 유사시에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는다.

 

셋째, 직원들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삼성에서는 실질적인 노조를 만들 수 없고 수많은 점조직을 통해 노조설립 기도는 ‘사전에 발각나고 말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심는다. 이를 위해 현장 곳곳에 무비카메라를 설치해 작업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든가, 기숙사 개인의 침실에 대해 매월 1~2회의 정기 검사한다.

 

넷째, 삼성이 제일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고 노조는 너희들보다 못한 회사 노동자나 하는 것이다, 삼성에서는 너희들에게 이렇게 잘 해주지 않느냐는 당근의 수법을 쓴다.

 

이런 체제 아래 삼성은 노조설립을 막기 위해 감시 회유 매수 공갈 협박 납치 감금 테러 해고와 공권력을 동원한 구속과 수배를 통해 무노조 50년을 지켜왔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1997년 9월 이러한 관리방식을 두고 삼성을 비롯한 한국의 재벌은 군사기구를 방불하게 한다고 묘사했다. 이러한 수단 몇 가지를 살펴본다.

 

첫째, 정보를 수집했다. 삼성은 국가기관을 능가한다는 정보수집력과, 그러한 정보수집을 가능케 하면서 아울러 정부의 정책결정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변경시킬 수 있을 만큼 정계 관계 학계 등에 걸친 광범한 로비력은 세간에 정평이 나 있다. 금융실명제의 실시를 사전에 알아내고 그것을 형해화한다는 비판을 받고 추후 보완조치 실시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라든가(박원배?안영배, 1994, 170~173쪽)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승용차산업 진출을 관철시킨 것들이 바로 삼성의 로비력과 정보력을 짐작케 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김기원, 1995 참조)

 

이러한 정보 수집 능력을 바탕으로, 현장 노동자에 대해서는 마치 일제 고등계의 감시체계을 연상케 하는 5호 담당제를 운영했다. 노조결성 원천 봉쇄전략으로 전 그룹에서 실시한 것으로 알려진 ‘5호 담당제’는 ‘노사간의 산업평화를 위한 전략작전팀’의 임무를 그룹 내 약 1,500명의 정보사원이 감시대상과 역할을 5가지로 나누어 수행하는 제도로 노조결성과 관련한 농성이 발생하면 공수부대 및 해병대 출신자들로 구성된 구사대나 세콤을 즉각 투입한다는 내용이었다.

 

1호 담당제는 전국 80여 개 사업장의 주변 유흥가와 독신자 아파트 3km이내 주위 길모퉁이 또는 노동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정보사원’을 배치해 노동자들의 모임이나 기타 움직임을 감시했다.

 

2호 담당제는 30여 개 노동운동단체 주변을 감시해 계열사와 관련된 유인물 등을 포착, 즉각 비서실 담당자에게 보고했다.13)

 

3호 담당제는 정보사원이 일반인으로 가장해 전국의 사업장, 특히 창원과 수원지역 등 65개 공장을 방문해 휴식시간이나 퇴근시간을 이용해 노조무용론을 현장 노동자에게 설득하며, ‘노조가 산업평화의 암적 존재’라는 여론형성이 주목적이었다.

 

4호 담당제는 계열사 사내에서 주로 3인 이상 모이는 공공장소, 휴게실 주변, 커피숍 등을 대상으로 사원이 사내 문제 불만이나 노조의 필요성을 말할 경우 이를 비서실에 통보하는 제도로 담당자는 16절지 10매 분량에 상세히 적어 보고했다.

 

5호 담당제는 노동부 치안본부 시도경 및 일선경찰서 구청 노동사무소 군청 등에 신변보호상 남자보다 덜 의심받는 여직원을 배치시켜 노조설립신고서 접수시기를 미리 파악해 발견 즉시 해당관청 총 책임자에게 알린 다음 팀장에게 보고했다.

 

삼성재벌이 자사 노동자들과 노동계의 동향을 파악해 노조결성과 분규를 미리 봉쇄한다면서 ‘정보사원’들을 본사와 전계열사 사업장은 물론 노동운동단체와 해당 관청 등까지 배치해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5호 담당제’는 대우나 현대그룹의 정보수집체제를 보다 체계화시킨 것이다.

둘째, 테러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977년 제일제당 김포공장에서의 노조결성기도를 폭력으로 무산시킨 이래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노조결성 움직임 속에서도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노조는 막아내겠다’는 삼성의 결사적 노무관리가 탄생시킨 또 하나의 걸작품이 세콤(SECOM, 한국안전시스템, 뒤의 삼성에스원)이었다. 1980년 일본 최대의 안전산업회사인 일본 세콤사와 합작으로 설립돼 각종 범죄와 재난으로부터 안전을 지키는 소위 ‘안전상품회사’인 세콤은 삼성에 ‘노조설립의 위험’에서 안전을 지키는 역할도 톡톡히 했다.

 

1988년 삼성중공업노동자들이 상경, 노총에서 농성을 하고 있을 때도 세콤 직원들이 동원 노총을 24시간 포위한 경우나 본관농성시 농성노동자들에 대한 폭력해산, 안국화재노조 설립 투쟁 때 주동자 추적 납치 등 그야말로 노조탄압의 전위부대인 세콤은 공수부대 해병대 출신의 무술유단자로 구성되었으며 간부는 상당수의 예비역 군인으로 구성되었다. 창원1공장 노동자협의회 이재용 위원장은 1993년 11월 회사측의 사주로 보이는 폭력배들의 테러를 당했다.

 

셋째, 정부와 공안기관과 언론의 비호를 받았다.

 

행정관청에 설립신고서를 갖고 가면 당국의 지원 아래 어느새 유령노조설립신고를 마치고, 유단자들을 고용해 설립주동자를 납치 테러 협박 감금하면서 유지되는 ‘비노조 경영’의 신화에는 노조설립 움직임을 기가 막히게 사전 탐지하는 삼성 노무팀의 ‘정보력’과 권력의 철저한 비호도 한 몫 했다. 전 신현확 삼성물산회장이 부총리를 지낼 당시 비서관을 지내는 등 친분이 두터웠던 장영철 전노동부장관이 삼성의 부당노동행위를 묵인하기 위해 장관에 취임했다는 당시 루머가 있었다.14)

 

국회는 정부 사용자 한국노총(노사정위)의 합의에 따라 1997년 3월 노동법 개정 때 상급단체는 바로 허용하고, 단위노조는 2002년부터 허용하기로 법을 개정했다. 그런 것을 2001년 2월 28일 복수노조금지를 5년 연장하도록 노동조합법을 재개정했다. 복수노조 인정은 1997년 3월 법이 제정된 뒤 10년간 시행이 연기되었다. 이에 따라 사용자의 유령노조로 인해 노조를 건설하지 못한 삼성재벌 등 일부 대기업 노동자들과 노조민주화 투쟁을 벌여온 일부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다시 어려움을 겪었다. 노사정위가 한국노총을 들러리로 내세운 자본의 하수인임이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해고자 원직복직투쟁위원회의 김성환 의장은 “이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삼성 등 대기업 소속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싸워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15)

 

1987년 10월 삼성전관민주노조 추진위원회의 움직임을 탐지한 고문 경찰인 경기도경 대공분실장 이근안이 회사측에 정보를 제공하고, 이윤섭을 고용하여 탄압을 사주하는 등 정부기관과의 협조가 잘 되어왔지만 5호 담당제는 이를 보다 체계화 한 것이다.

 

필요하다면 공권력을 동원하고 구속 수배조치로 사람을 묶어두었다. 1988년 거제 조선소노조 설립 추진 때 부당해고에 반대해 서울 본사점거투쟁을 했던 변성준은 노사협의회 무용론이 나올 시점인 1990년 6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변성준은 경남도경 대공분실에서 자신에 관해 회사측이 작성한 3년에 걸친 수십장의 기록을 발견하고 놀랐다.

 

삼성재벌은 중앙일보와 같은 언론사를 경영하며 다른 신문사들과 서로 상대의 비리나 잘못에 대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다. 삼성 노동자의 투쟁이 반세기의 역사를 가지지만 일간신문에서 관련 기사는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삼성광주전자의 노남준은 2000년 9월 “삼성전자가 서류상 편법으로 4년 동안 특별소비세 174억원을 탈세했다”고 폭로했으나 지역언론은 이를 보도하면 삼성전자가 광주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보도하지 않았다.16)

 

넷째, 삼성은 노동자의 항의 시위를 막기 위해 ‘가난한 나라’의 대사관을 사옥에 유치했다.

 

1998년 이천전기 노동자들의 집회를 막기 위해 싱가포르 대사관을 삼성본사 별관에 영입하고, 2000년 삼성생명 건물에 엘살바도르 대사관, 삼성 국세청 건물에 온두라스 대사관을 영입했다.(김성환?이정미, 2002, 215쪽) 외국 대사관 100미터 내에서 옥외집회와 시위를 금지한 집시법 제11조 1항을 악용한 것이다. 삼성의 이러한 조치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이 때문에 삼성 노동자들은 삼성의 본사가 있는 서울에서 집회를 하지 못하고, 그 계열사가 있는 수원, 천안 등 전국을 떠돌며 집회를 여는 실정이었다.

 

다섯째, 그래도 노조를 막기 어려울 지경이 되면 막판에 유령 노조결성 신고서를 관할 자치단체에 접수했다.

 

1989년 수원에서는 매일 공무원 퇴근시간 직전 해당 관공서에 유령노조 신고서를 접수하고 다음날 아침에 반려 받는 직원이 있었다. 1988년 4월 삼성중공업의 유령노조도 4시 50분에 접수했다. 2000년 5월 ‘결성된’ 에스원 노조도 유령노조이었다.

또 노동자협의회 노사협의회 한마음협의회와 같은 유사조직을 만든다. 노동자협의회가 가장 ‘강성’이며, 그 다음으로 노사협의회 한마음협의회 순이었다. 삼성조선에는 파업권이 인정되는 노동자협의회가 구성되었는데, 2000년 쟁의 찬반 투표에서 90.5%의 찬성이 나왔다. 그러나 노사협의회는 안건으로조차 올리지 못하고 임금협상 때 회사가 위원을 해외사업장으로 빼돌려 결국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17)

 

여섯째, 삼성은 노조를 막는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삼성은 노조가 없지만 1년에 노무관리비로 1천억원 이상을 썼다. 노동자탄압의 실상을 숨기고 깨끗한 기업 이미지를 만들려고 언론은 물론 정치계 법조계 행정관청까지 돈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18)

2002년 7월 이건희와 그 아들 이재용이 중심이 되어 5천억원대의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삼성은 1999년 12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00억원을 종잣 돈으로 기탁한 것도 노조탄압으로 더럽혀진 삼성의 이미지를 미화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2004년 삼성재벌은 유럽최대재벌인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이 사회의 감시를 받는 대신 세금을 더 내고 부와 경영권을 세습한 경험을 검토했다.19)

 

유연수단 삼성은 노조 추진을 강제수단으로 저지하여 노동자들을 심리적으로 무력화시키는 한편 유연한 수단을 써서 노조 추진을 단념시키려 했다.

 

삼성은 ‘생산성 향상과 기업 내 친화’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삼성은 스스로 그것을 ‘삼성마인드’라고 했다. 즉 “삼성이 제일이며 너희들은 다른 근로자와 다른 삼성의 근로자들이다. 노조는 너희들보다 못한 회사들에서나 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삼성에서 너희들에게 이렇게 잘해주지 않느냐”고 했다.(김형극, 1997, 193쪽) 구체적으로 동종업체보다 단돈 100원이라도 더 얹어서 임금을 주는 것을 들었다.

 

1991년 가전 3사의 임금수준(1991년 현재)을 살펴보면 월평균 임금(남자)은 삼성전자 113만 9천원, 금성사 93만 6천원, 대우전자 90만 7천원이었다. 상대적 고임금과 노조 불인정이 삼성 노무관리전략인 것이다. 삼성이 재계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무노조’의 배짱을 부린 까닭은 이런 임금 복지수준인 상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삼성의 노동자는 동종 타기업에 비해 상대적 고임금과 높은 복지수준을 얻는 대신 ‘단결권’을 희생하고 노동강화와 고용불안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무노조 경영의 사례로, 국외에서는 미국의 IBM GE GM ITT 모토롤라 코닥 듀퐁 애플, 일본의 이데미쓰(出光), 국내의 라니산업과 광림기계를 들었다. 대표적인 예로 IBM과 이데미쓰를 드는데, 이들 기업이 한결같이 인간 존중을 통한 노사 공존 공영의 노사관계를 경영의 기본이념으로 삼는다고 강조했다.(김선동, 1994, 59~62쪽) 그러나 광림기계는 창업자가 주식의 전부를 종업원에게 내놓아 종업원지주제를 전면 도입한 기업으로 삼성의 족벌소유 족벌운영과는 다르다.

 

또 삼성은 노동자를 독립된 주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로 보았다. 그러면서 노조 설립과 같은 행동을 두고 “삼성재벌은 부모고, 일하는 사람은 노동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자식(노동자)이 부모(삼성)에게 덤빌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바로 삼강오륜을 저버린 패륜아”라고 했다.20) 이렇게 삼성의 사원을 심리적으로 속박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노동자들은 각성하고 욕구도 다양해졌다. 노동자들은 단순한 밥벌이 노동이 아니라 자기실현의 노동을 원했다. 구체적으로 ‘참여의 욕구’와 ‘공평의 욕구’ 등이 포함되었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의 한 늙은 노동자는 “쇳가루를 마치며 몇 킬로그램(kg)하는 철구를 들어가며 땀을 흘리며 일하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등뒤에서 내 행동을 감시한다고 생각하면 땀이 싹 식어버려요. 우리가 돈 몇 푼 더 받자고 노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동료들과 내 목소리를 함께 낼 수 있다는 그것 자체가 의미가 있어요”라고 했다.21) 중도에 그만둔 삼성재벌의 한 사장은 “이러한 새로운 세상이 있었는지 몰랐다. 암흑 세상을 벗어난 것 같다”고 했다. 유화수단이라는 것은 노동자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지 노동자를 인간으로서 존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삼성재벌은 IMF 통치 이후 4만명의 노동자를 거리로 내몬 데다, 다시 반도체 불황을 이유로 노동자의 10%를 감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삼성에서 구사대 역할을 하는 삼성에스원의 노조 결성도 감원 위협에서 온 것이다. IMF 신탁통치를 경과하면서 삼성에서도 평생직장 개념이 완전히 깨졌다. 삼성이 내세우는 상대적으로 나은 임금과 복지수준으로 노동자를 회유하는 단계는 이미 넘어섰다.

 

3. 무너지는 삼성의 무노조 신화

 

삼성에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노조결성을 시도해 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에는 한 해도 노조설립 시도를 멈춘 적이 없다. 삼성해복투의 김성환 위원장은 삼성노조 설립 가능성에 대해, 가능성은 100%인데 상상을 초월한 탄압을 이겨내도록 단련해야 한다고 했다.(구영식, 2000b, 103쪽)

 

삼성재벌의 노무관리 조건도 삼성이 무노조를 밀고 나가기 어려운 쪽으로 변화했다. 삼성이 비교우위로 가지고 있던 처우와 복리후생제도가 기업간 평준화되면서 차별적 우위를 점차 잃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동종업계의 다른 회사보다 근로조건이 낮은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노조가 있는 기업의 경우도 기업별 노조주의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삼성의 무노조 정책이나 노사협의회 운영이 절대적인 비교우위가 될 수는 없다. 노사협의회를 노조의 대체 수단 또는 의사 소통의 채널로 활용하는 삼성으로서는 노사협의회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노사간에 상호 신뢰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또 그룹 전체의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통일적으로 운영하는 삼성이 가진 근본적 문제로, 경영상태가 덜 좋은 기업의 노동자 요구를 그룹 전체 차원에서 충족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삼성 내부에서 보면 노조 가입 대상 노동자의 연봉이 3, 4천만원 정도인데 비하여 삼성전자 이사의 경우 연봉이 최고 35억원에다 스톡옵션을 합치면 재산이 수백억원이 되는 경우도 있어 종업원 상호간의 위화감도 문제가 되었다. 삼성은 IMF 통치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4만여 명을 해고했다. 2001년에는 전체 노동자 12만 명 가운데 10%인 1만 2000명을 해고할 계획이었다. 삼성전기, 삼성SDI, 삼성전자는 반도체 불황으로 타격을 입어 2001년 노동자 2만 6000명 가운데 4,400명 또는 30%를 해고할 계획이었다.22)

 

일본과는 달리 재벌총수에 의한 소유와 경영의 독재체제가 견지되고, 의식면에서조차 노동자가 기업의 주체로서 포섭되지 못한 조건 아래 노동과 자본의 계급적 대립이 분출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삼성은 가능한 한 정면 충돌을 회피하려 했다. 다른 노조가 있는 기업의 노동자는 구조조정 해고에 격렬하게 투쟁했다. 삼성의 노동자가 노조가 없다고 회사의 해고조치를 두고만 볼 것인가? 특히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과다한 부채로 연쇄적으로 도산23)하는 것을 보는 삼성 노동자에게 노조 결성은 생존권을 지키는 데 필요한 대안이었다.

 

삼성재벌은 복수노조가 현실화되는 2007년을 대비해 최상급의 변호사를 고용하고 회사마다 자체적으로 노무사를 양성해 배치하였다. 현재는 복수노조가 유보되고 있지만, 장차 삼성은 복수의 유령노조를 만들거나 아니면 일본의 경우처럼 복수의 노조를 만들고 서로 경쟁시켜 이용하는 방법을 택할 수 있다.

또 국민경제의 입장에서 볼 때 삼성은 국내 1위의 대기업집단으로 이건희나 그 가족의 소유물이 아니라 국민의 피와 땀이 쌓인 기업으로 소유주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다. 삼성재벌은 이건희와 그 가족 등 3, 4대의 지분이 극히 낮은 상태에서 사실상 국민기업이다. 이러한 기업의 경영상태에 국민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노조의 결성은 조합주의라는 한계는 있지만 기업경영을 감시하고 기업경영에 참여하면서 재벌총수의 전횡을 예방하는 수단의 하나를 확보하는 것이다.

삼성은 IBM, 맥도날드와 함께 노조를 거부하는 대표적인 초국적 자본의 하나이다. 삼성 노동자의 노조 요구는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외에도 있다. 전 세계 코카콜라 노동자가 서로 연대하여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고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듯이 삼성재벌에 속한 국내외 기업의 노동자들이 연대할 수도 있다. ‘노동자의 단결권을 부인하는 삼성 상품 사지 말자’와 같은 연대는 아직 실효성이 약하지만 이미 간헐적으로 전개되었다.

 

아울러 이건희 회장이나 삼성그룹 말대로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재벌 총수들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놓아야 한다. 그것도 재산을 내놓은 것처럼 해 편법을 써서 오히려 이득을 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식으로 환수해야 한다. 그리고 총수의 경영권을 박탈해야 한다. 5대 재벌의 부실경영으로 인한 은행 등 금융권의 부실화를 공적 자금을 통해 메운 상태에서, 이건희 족벌이 삼성의 경영권에 대해 무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약하다.

재벌 대책에 대해 경실련은 소유와 경영의 분산과 세습반대, 참여연대는 소액주주의 보호, 노동자는 재벌해체를 주장했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 기업의 공기업화도24) 하나의 대안이다.

 

각주)-----------------

재벌은 급속한 문어발식 외형 확장 과정에서 교차와 중복출자, 우회적 상호출자 등의 방식, 그리고 상호지급보증, 내부 거래시의 상호지원 방식 등을 이용하여 총수가 법적으로는 독립적인 개별 계열사들을 선단식으로 경영하는 경영독재체제이다.(김기원, 1998 참조)

삼성그룹 해고자복직투쟁 위원회는 성명(2000. 3. 27)에서 “삼성재벌은 수백억원의 상속세만 내고 수십조원의 재산을 편법 상속했다.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인 재용은 1995년 말 아버지로부터 증여 받은 46억 8천만원을 종자돈으로 삼성에스원 삼성엔지니어링 에버랜드 삼성전자 제일기획 삼성SDS 등의 전환사채 사모사채 신주인수권부사채 등을 매입하거나 인수하는 탈법적인 방법으로 3년만에 자산을 시가 4조원이 넘는 계열사 주식을 보유하는 방식으로 상속받았다”고 했다.

www.stopsamsung.org

주간정세동향 1999. 7. 5.

삼성재벌의 부도덕하고 천민적인 행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삼성건설은 1998년 용산구 도원동을 재개발해 아파트 장사를 하기 위해 ‘적준’이라는 철거 용역깡패를 동원해 살인적인 강제철거, 철거민 납치, 방화를 자행했다.

김말룡 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설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의 증언, 1996.

한국노총에서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이 1백18일째 농성을 벌이던 1989년 3월 11일 열린 국회 노동위에서 김무연이 “사우협의회가 자율기구로서 종업원의 대의기구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인제 전 노동부장관은 “아니! 이봐요! 김무연씨가 무슨 정치인도 아니고…전체 근로자의 뜻을 어떻게 그렇게 김무연씨가 다 알아요?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있어요. 여기 무슨 아이들 데려다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야지…”라고 김무연씨의 사고와 행동을 ‘독재’라고 몰아부쳤다.(??노동일보?? 1994. 6. 7)

대법원 제3부 판결 1996. 6. 28 선고, 93도855 판결은 “삼성중공업(주) 노동조합(김무연노조)은 ① 법외노조의 노조설립을 막기 위하여 급조된 노조이고 ② 그 조합원의 숫자조차 불분명하여 실체가 확실하지 않고 ③ 그 설립이래 조합비의 징수, 총회의 개최, 단체교섭 등의 노조활동을 한 실적이 없고 ④ 반면 근로자들의 자유로운 가입시도를 방해하고 있는 사정이 엿보이는 바 즉 이른바 ‘김무연노조’는 단순히 노동조합 설립 후 노조로서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경우라기 보다는 노동조합으로서 실질을 가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며 삼성중공업 노조는 실질적 노조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노동운동 탄압 중단하고 구속자를 석방하라?, 1997. 5. 28, 민주주의 민족통일 마창연합.

주간정세동향?? 1999. 7. 5.

한겨레신문 2000. 9. 21.

한겨레신문 2002. 7. 30.

경수지역노동자연합사건(1991. 3. 14), 경남노동자협의사건(1997)은 삼성의 노동조합 추진과 관련있다.

노동일보 1992. 2. 28.

한겨레신문 2001. 2. 10.

말 2001년 5월호.

노조를 아예 봉쇄하는 삼성과는 달리 노조를 적당히 키워주면서 통제하는 방식, 즉 타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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